이진희
벼룻물

By 2023년 06월 07일작가 인터뷰

『벼룻물』 이진희 작가 인터뷰

현재에 정성을 다하며 완전히 몰입하여 사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표지 이미지>

 

『벼룻물』이 출간되었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3년 간의 여정이 잘 마무리되어 뿌듯한 마음과 함께 출판하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벼룻물』은 ‘십장생도’를 모티브로 쓰여진 이야기인데요,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가 있으신가요?

아름다운 우리 전통 회화를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서양화처럼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우리 그림은 단순히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입니다. 등장하는 소재마다 의미를 담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거기에 제가 삶의 지표로 삼고 싶은 이야기를 더해 엮어 나가고 싶었습니다. 다채로운 소재가 등장하고 그 안에 이야기가 담긴 ‘십장생도’는 아름다운 우리 그림책을 쓰고 싶은 저에게 행운처럼 다가왔습니다.

 

<초기 스케치>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나요? 이야기를 구상하실 때 가장 염두에 두신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십장생도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오래 사는 동식물과 변치 않는 자연물들을 소재로 그린 그림입니다. 영원을 염원한다고 할까요. 하지만 생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에서만 가능합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가치를 지니는 정신만이 영원합니다. 조상들은 ‘십장생도’를 통해 그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손끝에서 조상들의 염원이 피어나듯 조상들의 생각은 결국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이어집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과 생각은 결국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니까요. 이어령 선생님이 ‘내 육체가 사라져도 내 말과 생각이 남아있다면 나는 그만큼 더 오래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듯이요.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아버지를 따라 나선 숲길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귀한 존재들을 만납니다. 그 만남을 하나의 길 위에서 엮어내는 일도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을 것 같은데요, 그 흐름과 이야기를 어떻게 잡아나가셨을지 궁금합니다.

길을 나서는 어두운 새벽에서 환하게 동이 트는 시간의 흐름은 주인공의 마음에 점차 깃드는 광명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주인공이 관찰을 통해서 탐색하다가 좋은 것에 이끌려 경험하게 되고, 그것이 깨달음과 성장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큰 줄기로 잡았습니다. 많이 보고 들으면서 깨닫고, 잘 그릴 수 있는 그림의 기본 원칙을 적용했습니다. 거기에 장생도 속 존재들의 의미를 살려 유기적으로 결합하였습니다.

 

<초기 채색>

 

작가님도 왠지 주인공처럼 많은 ‘길’들을 걸어 보셨을 것 같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소중한 존재나 기억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영화와 책에는 수많은 길들이 있지요. 그중에서도 살면서 만났던 가슴 벅찼던 영화가 생각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와 <위플래쉬>, 그리고 <바베트의 만찬>입니다.

오늘을 살았던 죽은 시인들이 말하는 시대를 초월한 가치와 그 정신을 학생들에게 전하려는 키팅 선생님! 이분의 수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수업의 주제가 되고 있는 위인의 곁으로 학생들을 인도하지요.

예술에 ‘적당히’란 없다는 <위플래쉬> 속 플레처 교수님의 대사도 떠오르네요. (There are no two words in the English language more harmful than ‘Good job’.)

자신을 구한 고마운 이들에게 복권 당첨금 전부를 들여 예술과 다름없는 요리들로 만찬을 대접하는 요리사 바베트의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그림에 담긴 조상들의 염원을 현재의 관점에서 새로이 승화시키면서 동시에 그림 한 점에 임하는 조상들의 마음가짐을 이어받는 것이 중요한 과제처럼 보입니다. 작가님이 가지고 계신 ‘그림, 혹은 예술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한 번에 이루겠다는 마음을 비우고 꾸준히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꾸준함이 기술을 만들고, 기술이 궁극에 달하면 예술이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기본은 꾸준함인 것 같습니다. 작업 중에도 힘을 빼고 찬찬히 쌓아간 그림을 볼 때 제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전에 불꽃 같은 열정을 열망했다면 지금은 얼음처럼 차가운 열정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간 수채화로 그린 바위 그림이 있어요. 붓을 깨끗이 씻어 가며, 물을 자주 바꿔 가며 깨끗한 색을 덧입히며 천천히 완성했어요. 결국 완성 단계에 왔을 땐 바위는 차분하고 단단해졌고 지금도 그 그림을 볼 때면 제 마음도 차분하고 단단해집니다. 원래 제 그림을 액자에 넣지 않는데 그 그림은 액자에 담아 놓았어요.

신의 경지의 연주에 도달하려고 하는 위플래쉬의 플레처 교수님, 한이 서린 창을 노래하게 하려 딸의 눈을 멀게 했던 서편제 속 아버지, 지독한 완벽주의와 철저한 장인 정신으로 유배지에서 추사체를 완성한 김정희 선생님··· 등이 예술에 대해 가졌던 마음가짐을 감히 추측하며 동경하고 있습니다.

 

<초기 채색>

 

이야기 속 주인공에게 아버지가 그랬듯,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 주는 ‘스승’이 있다면 그것만큼이나 더한 복도 없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에게도 그런 스승이, 혹은 가슴에 새기고 계신 특별한 가르침이 있으시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책 속의 작가 소개에 언급한 시습재(時習齋) 모임을 이끌어 주셨던 스승님이 계십니다. 교육에 대한 성찰은 곧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셨어요. 평생 공부하시면서 가슴에 품은 이야기를 해 주시곤 했습니다. ‘나태하지 않게 성급하지 않게’는 당신의 스승님께서 우리말 ‘시나브로’를 풀어 주신 말인데 제게도 전해 주셨습니다. 게으르면서 급한 성미의 제가 가장 따르기 힘든 말이라 늘 생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거북이 장면에서 그러한 의미를 일면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책 속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 그리면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 있을까요?

‘바스락’하면서 작은 사슴이 나타나는 장면이요. 정말 만나고 싶었던 사슴의 등장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선물 같은 순간이에요. 사슴 주변으로 나뭇가지들이 흩날리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잖아요. 주인공의 마음속 환희가 온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저 또한 주인공이 되어 숲속을 헤매는 느낌을 받습니다.

 

<초기 채색>

가장 고민이 많았던 장면은?

해가 떠오르는 장면이요.
해와 하늘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말을 써 놓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데 그림으로 그릴 때는 그 말을 쓴 것이 얼마나 괴로웠는지요.
장경판전을 보러 합천에 여행을 갔다가 철쭉과 일출로 유명한 황매산에 올랐어요. 안개구름에 쌓인 산봉우리들 사이로 떠오르는 해에 압도당한 뒤 그 느낌을 화면에 담았습니다.

 

<초기 채색>

 

어떤 재료와 기법, 효과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셨어요?

디지털 드로잉이라고 말씀드리면 소재와 상반되는 재료라고 느끼실 수도 있겠네요. 이야기 속 아버지께서는 그림의 ‘선’을 강조하시지요. 아버지와 올랐던 산의 길, 눈이 붓이 되는 시선의 길, 그림을 깨우는 영혼의 길, 이 모든 것들을 ‘선’으로 담았습니다. 이 선들이 빛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이길 바랐습니다. 디지털 드로잉이라 용이한 면도 있었어요.

빛을 품은 선이 모니터에서 종이로 옮겨지니 선명한 느낌이 화면에서와는 달랐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16대의 디지털 기기에 이야기 장면을 모두 각기 담아 전시하고 싶습니다. 밝고 선명한 그림들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디지털 원화 전시회’가 되겠네요.

 

작가님에게 그림책은 어떤 의미일까요? 앞으로 그려내고 싶은 이야기들은 어떤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그림책은 선물이에요. 작가 삶 속 최고의 순간을 이야기와 그림으로 다시 담아내어 독자에게 건네는 선물이요. 앞으로 만나게 될 혹은 잊고 있었던 제 인생 최고의 순간들을 책으로 담아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초기 채색>

 

작업 중에 있었던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작업하는 기간에 유독 제게 휴식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림을 얼추 완성한 뒤로는 저만의 안식과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여가도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떠났던 모든 여행과 여가 속 최고의 순간들이 다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 벼룻물이 떠나지 않으니 수정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오래 작업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작업과 여가의 경계가 사라지는 경험을 했어요.

 

이 책을 작업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으세요?

현재에 정성을 다하며 완전히 몰입하여 사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영원’을 사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등장 소재와 시간적 공간적 배경 모두에 주제와 동일한 색을 입히고 싶었습니다. 명감독의 역사적인 미장센처럼 책 속 모든 요소가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를 상상했습니다.

 

“나에게 『벼룻물』은 ( )이다.” 빈칸에 어떤 말을 넣고 싶으세요?

나에게 『벼룻물』은 ‘벼룻물’이다.

벼룻물 자체가 제게 벼룻물이지요. 고요한 시간,  제 안에서 길은 벼룻물입니다.

 

<초기 채색>

 

독자들이 『벼룻물』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누구에게 주어도 좋아할 선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었습니다. 독자의 연령대를 특정하지 않고 누구나 읽고 각자의 느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어요. 다만 책 속의 이야기를 나만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조상들이 영원하기를 바랐던 소망이 책을 덮은 후에도 독자 여러분들의 삶에서 이어지도록이요.

 

 

 

※Editir’s note

작가 추천 노래, 그리고 그 노랫말의 모티브가 된 시와 함께 『벼룻물』을 읽어 보세요.

 

– 새로운 길 · 동화, 시인의 나라 Part1

℗ DANAL Entertainment

 

– 윤동주, ‘새로운 길’

Leave a Reply